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즐거운 나의 집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[[미국]]의 [[극작가]]이자 연극배우였던 존 하워드 페인(1791~1852, John H. Payne)이 1823년에 직접 대본을 쓰고 영국 [[작곡가]] 헨리 비숍 경(1786~1855, Sir Henry R. Bishop)이 작곡한 [[오페라]] "클라리, [[밀라노]]의 아가씨"(Clari, or the Maid of Milan)에 등장하는 한 곡으로 오페라는 잊혀졌지만 이 곡만은 살아남아서 '홈 스위트 홈'은 미국의 [[히트송]]이 되었다. 곡이 쓰여진 지 40년이나 지나 [[남북전쟁]]이 터지면서 북군이고 남군이고 가릴것 없이 이 노래를 불렀는데, 전쟁이 끝나서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반영했다고 한다. [[에이브러햄 링컨|링컨]] [[미국 대통령]]도 이 노래를 좋아해 늘 즐겨 불렀고 [[백악관]]에 초청된 [[가수]]가 이 노래를 불렀으며, 심지어는 백악관에 한동안 Home Sweet Home을 자수를 놓아서 장식할 정도였다고 한다. 그러나 작사자인 하워드 페인 자신은 살면서 단 한 번도 가정을 가지지 못한 채 방랑하며 살았다.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851년 3월3일 그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. 여기에는 "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가정의 기쁨을 자랑스럽게 노래한 나 자신은 아직껏 내 집이라는 맛을 모르고 지냈으며 앞으로도 맛보지 못하겠지..." 라는 글이 비통하게 적혀있었다. 그는 조국 미국을 떠나 유럽과 아프리카를 골고루 방황하며 살았고 이 곡을 작사할때는 프랑스 파리에서 가난하게 살았다. 1842년 튀니지 영사로 부임했고, 그 곳에서 10년동안 튀니지 영사로 살다 1852년 [[튀니지]] 튀니스 시에서 만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. 그래도 그의 유명세 덕분에 1842년 튀니지 영사로 임명되었고, 덕분에 쪼들리며 살지는 않았던 게 그에게는 위안이었다. 이상하게도, 그가 튀니지 길거리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고 여전히 인터넷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, 1990년대 초에 나온 [[이외수]]가 쓴 책자에서도 이렇게 나와있던 걸 보면 오래전부터 이렇게 알려져 있었다. 죽을 당시, 그는 후손이 없었지만 이런 말을 남겼다. > “내게 돌아갈 가정은 없지만 고향 공동묘지에라도 묻어주시오." 31년이 지난 1883년 조국인 미국 워싱턴 세인트 조지 교회 공동묘지에 안장됨으로써 그제서야 편히 쉴 곳을 얻게 되었다. 그래도 이때 페인의 탄생 92주년에 맞춰 페인의 안장식을 열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은 물론 당시 미국의 대통령인 [[체스터 A. 아서]]까지 참석해 그를 추모했다고 한다. 그가 단순히 유럽을 떠돌며 이렇게 살았던 이유가 있다. 페인은 1830년대 미국으로 와서 당시 백인으로 무척 드물게 미국 원주민 [[체로키]]인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라는 운동을 벌인 극소수 백인이었다. 원주민 차별과 탄압으로 수만여명이 비참하게 죽어갔고 분노한 페인은 원주민 탄압을 주도하던 [[앤드루 잭슨]] 대통령에 대해 [[미국 의회]]에 로비하면서 [[미국 연방대법원]]을 무시한 독재자라고 탄핵까지 주장했으나 받아들이지지 않았다. 이로 인하여 페인은 조국에 대한 실망을 느끼고 미국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던 거였다. 그래도 워낙에 이 곡이 유명해져서 튀니지 영사가 될 수 있었으나, 죽을 때까지 조국에 돌아가지 않았다. 미국의 체로키인들은 이런 인연으로 그를 존경하여, 작은 추모비를 손수 세워주며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. 작곡자인 헨리 비숍은 조국 영국에서 기사 작위도 받고 [[옥스퍼드 대학]] 교수가 되면서 부와 영예를 누리고 평온하게 살아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